재고를 물으면 장부를 열기 전에 창고나 포워더에 먼저 전화하는 무역 회사가 많습니다. 장부에 적힌 수량과 실제로 있는 수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. 수입하는 회사라면 한 겹이 더 붙습니다. 이미 선적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물건, 도착했지만 통관을 기다리는 물건도 재고이기 때문입니다.
큰 회사도 사정이 같습니다. 유튜브 채널 AI Frontier Korea의 117화에서 고종옥 코스맥스 PI혁신부문장은 SAP나 더존 같은 ERP가 원래 회사의 단일 정본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. 지금 재고가 몇 개인지, 이 제품을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지가 ERP 안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. 그런데 실제로는 그 정보가 ERP 바깥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습니다.
숫자가 늦게 도착합니다
고 부문장이 든 예는 이렇습니다. 오늘 자재가 들어오고 생산 실적도 각각의 표에는 기록됐는데, 그 숫자가 기준 정보에는 아직 반영되지 않았습니다. 일정한 주기로 몰아서 갱신하기 때문입니다. 실적 입력 같은 일을 누군가 자동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야 하고, 매번 돌리기에는 ERP에 걸리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이유였습니다. 고 부문장 설명으로는 코스맥스의 자재 기준 정보만 수십만 건이 넘고, 이 갱신이 일곱, 여덟 시간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.
그사이 현장은 기다리지 않습니다. 고 부문장은 담당자들이 전화로 몇 개가 더 들어왔는지 확인한 뒤에야 생산을 시작하고 고객에게 납기를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. 대담 상대인 노정석 비팩토리 대표(코스맥스 디지털 자문)는 이를 정리하며, 일은 결국 각 팀의 엑셀에서 돌고 팀끼리 전화와 메신저로 숫자를 맞춘 뒤 기록을 남기려고 ERP에 나중에 넣는 구조라고 짚었습니다. 고 부문장은 그렇게 맞춘 숫자가 ERP에 들어가야 비로소 납품하고, 세금계산서를 발행하고, 매출을 잡아 대금을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. 노 대표는 앞선 대목에서 이런 모습을, 함께 커 오지 못한 시스템에 커 가는 조직이 적응한 결과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.
코스맥스는 규모가 아주 큰 회사입니다. 그래도 수량이 바뀌는 길이 여러 개라면, 같은 흐름을 가진 작은 무역 회사에서도 같은 일이 생깁니다.
물건이 머무는 자리마다 숫자가 하나씩 생깁니다
무역 회사의 재고는 한 창고에만 있지 않습니다. 공급사가 선적을 마친 순간부터 물건은 배나 비행기 위에 있고, 도착하면 통관을 마칠 때까지 보세창고에 머물고, 그다음에야 자사 창고나 고객사로 갑니다. 한 발주가 여러 번에 나눠 선적되면 같은 품목이 이 자리들에 동시에 흩어집니다. 자리마다 수량을 아는 사람이 공급사, 포워더, 관세사, 창고 담당으로 다르니, 어느 순간에 보더라도 숫자 하나는 늦거나 빠져 있습니다. 같은 거래를 견적서와 발주서와 엑셀에 따로 옮겨 적으면 숫자는 한 벌씩 더 늘어납니다.
그래서 어긋남을 줄이는 방향도 분명합니다. 수량이 바뀌는 길을 하나로 모읍니다. 선적과 도착, 통관과 입고를 확정하는 자리에서 재고의 상태가 바뀌게 하고, 그 기록이 발주 잔량과 원가, 청구까지 이어지게 합니다. 입고는 LOT 단위로 받아 인보이스·패킹리스트의 수량과 실제 수량을 나란히 두고 차이를 남깁니다. 포워더 청구서가 늦게 오더라도, 그 숫자가 들어갈 자리를 미리 비워 둡니다.
이 일을 하려고 쓰던 ERP를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. 잘 작동하는 부분은 그대로 두고, 숫자가 끊기는 자리부터 잇습니다. 어디까지 이을 수 있는지는 회사마다 다르기 때문에 현장을 먼저 보고 정합니다.